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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원

신라 고분들이 모여 있는 대릉원은 경주 시내 한가운데 약 12만 6,500㎡의 너른 땅 위에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30기의 고분들이 자리 잡고 있다.
옛날무덤들 속에는 무덤 주인과 함께 수많은 껴묻거리(부장품)가 같이 묻혀 있고 때로는 무덤 주인의 시종이나 노비들이 함께 묻히는 순장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대릉원은 신라의 왕권강화가 이루어졌던 시기인 4세기에서 6세기 초까지의 무덤이라고 볼 수 있다.
천마도의 '천마총'과 대릉원이라 이름 붙이게 된 댓잎군사의 전설 이야기가 재미있는 '미추왕릉', 경주에서 가장 큰 무덤이면서 금관이 발굴된 '황남대총' 등이 모여 있다.

1970년대 정부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98호분(황남대총)을 발굴한 뒤 내부를 복원하여 교육 및 연구 자료로 삼고자 했으나 그와 같은 큰 고분을 발굴해본 경험이 없는 터라, 그보다 작고 가까이에 있는 155호분을 발굴하여 경험을 쌓으려 했던 것이 지금의 천마총이 되었고 이 때 모두 1만5천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경주의 신라무덤들을 능, 총, 묘로 구분하는데, ‘미추왕릉’처럼 어느 왕의 무덤 인지 확실 할 때는 왕의 이름을 붙여 '능'이라 하고 '총'은 천마총과 같이 발굴 후, 출토된 유물의 보존 가치가 높지만 누구의 무덤인지 모를 때, '묘'는 '김유신묘'처럼 귀족이하 일반인들의 무덤에 붙여진 이름이다.

오래 된 역사일수록 역사서 속에서도 기록되지 않은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있기 마련인데, 무덤들은 책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알려주기도 하는데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입고, 먹고, 잤는지 같은 생활상의 지식창고 역할을 하고 있다.

첨성대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만들어진 첨성대가 별을 관측하는 천문대에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라는 주장, 사방 어디에서 보나 똑같은 모습 그 자체로 해시계의 역할과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을 본떠 만든 건축물 등 여러 주장들이 있다.

유려한 곡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서 있는 첨성대는 둥근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과 네모난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쌓은 돌이 모두 362개로, 음력 1년의 날 수와 같고, 12개의 기단은 1년의 12달을 의미해서 신라인들에게 달력의 개념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한다.

첨성대가 세워진 후, 삼국사기에는 일식, 월식, 혜성의 출현, 기상이변 등을 관측한 기록들이 예전 보다 많고 매우 정확한 것이어서, 아름다운 외형과 과학적인 구조로 만들어진 첨성대가 뛰어난 건축기술과 과학기술이 접목된 우리 민족의 독창적인 문화유산임에는 틀림이 없다.

경주 월성

신라의 궁궐로 사용된 월성, 모양이 반달모양과 같아 반월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행히도 지금은 건물들은 전해지지 않고 궁궐로 사용된 터와 해자만이 남아 있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았지만, 지금 이곳의 땅 속에는 신라시대의 유적, 유물들이 많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박혁거세 21년에 궁을 만들어 ‘금성’이라 불렀으며, 새로 쌓은 월성 북쪽에 만월성이 있었다.”고 한다.
예전의 금성이나 만월성이 어디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길 하나를 두고 갈라져 있는 안압지와 더불어 월성 일대는 신라의 궁궐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 되고 있다.

삼국이 통일 된 후 문무왕은 궁궐을 넓히기 위해 해자를 메우고 일부는 연못으로 만들었다. 월성 북동쪽에 보이는 곳이 동궁으로 사용된 임해전지인데, 동궁은 태자가 머무는 곳으로 월성 밖으로 궁궐을 확대하면서 새롭게 세워진 곳이다.
그리고 월성 앞으로 보이는 첨성대까지 궁궐의 주춧돌이 이어져 있어서 그 규모가 정말 컸을 것을 짐작하게 한다.
성문터와 성벽 밑으로 물이 흐르도록 한 인공 방어 시설인 해자가 있었음이 밝혀졌으며, 조선 영조(1738)때 만든 석빙고 시설이 남아 있다.
월성 북쪽 자락에는 벚나무, 월성과 첨성대 사이에는 유채 꽃밭이 조성되어, 제철이 되면 장관을 이룬다.

경주 계림

김 씨 왕조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깃든 숲, 계림은 원래 성스러운 숲이란 뜻의 ‘시림’으로 불렸는데, 닭과 관련된 김알지의 탄생설화 때문에 닭이 우는 숲이란 뜻의 계림으로 불리게 되었다.
탈해왕 9년(65년), 왕은 한밤중에 금성 서쪽, 시림이라는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신하를 보낸다. 조그마한 금빛 궤짝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고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으며,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아이는 갈수록 총명함을 더했고, 이름은‘알지, 금궤 속에서 나왔다 하여 김이라 성씨를 붙였다. 탈해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왕위를 받지 않았으며, 김알지의 육대손에 와서 김씨가 왕이 된다.

신라인들에게 닭은 어둠을 물리치고 아침을 알리는 동물로 매우 신성한 존재로 여겼으며, 황금상자는 권력을 상징하는데 토템과 금 숭배 사상을 짐작케 한다.

계림 안에 있는 고분은 신라 17대 내물왕(356~402)의 능으로 알려져 있다. 내물왕은 김씨로는 두 번째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로 김씨에 의해 세습이 유지되었다. 왕의 칭호로 ‘마립간’을 썼다.

경주 임해전지(안압지)

문무왕 674년, 삼국을 통일하고 국력이 강해지면서 궁궐도 커지게 되어 신라 왕궁의 별궁이며, 태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안압지 남쪽에 신라 궁인 월성이 있어 이곳까지 자연스럽게 커진 것으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던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안압지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궁 안의 못'으로만 기록되었다. 1980년대‘월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굴되며, 본래 이름은 ‘달이 비치는 연못’이란 뜻의‘월지'라고 불렀다.

이후,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곳이 폐허가 되자 시인묵객들이 연못을 보며 ‘화려했던 궁궐은 간데없고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든다.'는 쓸쓸한 시 구절을 읊조리고 그 때부터 기러기 '안'자와 오리 '압'자를 써서 ‘안압지’로 불리게 되었다.

안압지를 볼 때 주목할 만한 것은, 동서 길이 200m, 남북 길이 180m,총 둘레 1000m로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가장자리에 굴곡이 많아 어느 곳에서 보아도 연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신라인들의 세련된 창의성이 돋보이며, 못 안에는 동양의 신선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섬 세 개와 열두 봉우리를 만들었고, 물을 끌어들이는 입수 장치나 배수구 시설 또한 교묘하고 세심하다.
또한, 신라 특유의 우아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기와류, 화려한 금속 공예품들도 주목할 만하지만, 나무배와 나무로 만든 각종 건축 부자재, 나무편을 얇게 깎아 글을 기록한 목간 등도 매우 귀중한 생활 유물이다.
이 곳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만 무려 3만여 점으로, 왕실과 귀족들이 실생활에서 사용하였던 실생활용품이 대부분인데, 예술성이 뛰어난 명품 700여 점을 선별하여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관에 전시하고 있어 단일 유적지인 안압지에서 얼마나 대량으로 유물이 출토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경주 오릉

지정번호 : 사적 제172호
소재지 : 탑리1길 18-2 (탑동)

경주시내 평지 서남쪽에 위치한 4기의 봉토무덤과 1기의 원형무덤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혁거세왕이 임금자리에 있은지 62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다가 7일 후에 몸이 흩어져 땅에 떨어지자 왕비도 따라 죽으니, 사람들이 같이 묻으려고 했으나 큰 뱀이 방해해서 몸의 다섯부분을 각각 묻었는데, 그것을 경주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했다고 한다.
내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무덤의 겉모습은 경주시내에 있는 다른 삼국시대 신라무덤과 같이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1호 무덤이 높이 10m로 가장 크며, 2호 무덤은 표주박형으로 봉분이 두 개인 2인용 무덤이다.
이러한 대형 원형 봉토무덤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 등장하는 것으로 박혁거세 당시의 무덤 형식은 아니다.

분황사

634년(선덕여왕 3)에 창건(創建)되었다.
국보 제30호로 지정된 모전석탑(模?石塔)을 비롯하여, 화쟁국사비 비석대(和諍國師碑 碑石臺)·석정(石井)·석조(石槽)·초석(礎石)·석등·대석(臺石)과 사경(寺境) 이외에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남아 있어 보존되고 있다.

이 절에는 775년(경덕왕 14) 본피부(本彼部)의 강고내미(强古乃未)가 구리 30만 6700근을 들여 만들었다는 약사여래동상이 있었다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원효(元曉)가 이곳에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썼고,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은 신화(神畵)로 일컬어졌다. 또한 절의 좌전에 있었던 천수대비(千手大悲) 벽화는 매우 영험이 있어서 눈 먼 여자 아이가 노래를 지어 빌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고 전한다.